그 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슬그머니 죄어져 오는 흐릿한 어둠 속으로 그녀는 마치 안개 드리워진 하늘을 날듯 비틀거리며 내 곁에서 멀어져 갔지만 한웅큼씩 사라져가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숭배했던 고갱의 자화상과 창밖 풍경이 보기 좋았던 여름을 달리는 버스의 맨 뒷좌석과 토요일 오후만 되면 찾아갔던 삼류극장 속의 추억들은 이제 손때 묻어 주인 잃는 오래된 가구처럼 가을 낙엽 속으로 지고 있었다 그렇게 쓸쓸하던 헤어짐의 오후들이 하나 둘씩 쌓여 마치 무중력의 세계를 떠다니듯 밤하늘의 별들만큼 외로이 있다는 걸 느꼈을 때 나는 그녀가 혹시 내 주위에 있지는 않을까 해서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멀어버린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길 위를 걷다가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도망쳐 오기도 했고 아무도 받지 않는 익숙해진 전화벨이 아득해질 때까지 잠에 취해 있기도 했으며 가슴 벌이던 밀려오는 답답함으로 거리를 방황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그저 그녀가 남기고 간 따뜻한 체온만이 내 마음속에 새겨져 있을뿐 그녀는 영원한 헤어짐으로 내가 모르는 길을 떠나간 것이다 이제 그녀를 잊어야 할 때가 왔다 세월 속으로 지워져가는 그녀와의 추억은 기억의 책장 속에 곱게 묻어둔 채 그녀도 나만큼 아파했을 것이다 아마 더 큰 고통으로 몸부림쳤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많은 이별들이 그렇듯이 내 가슴속엔 그녀에게로 향하고 대답없는 전화벨 소리가 있다